사랑의 이율배반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삶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사모곡
어머니는 죽어서 달이 되었다
바람에게도 가지 않고
길 밖에도 가지 않고,
어머니는 달이 되어
나와 함께 긴 밤을 같이 걸었다
별들의 세계
"다만 멀리 존재함으로 환상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별들의 세계가 그러하다.
너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자주 그러하듯 쉽사리 사라지고 만다.
그의 진심이 궁금해 읽은 책 속에서 내 마음을 오래 잡아두었던 구절이다.
이제야 깨닫는다.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그래서 내게 얼마나 먼 사람인지.
그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너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자주 그러하듯"
안녕
우린 아마
기억하지 않아도
늘 기억나는 사람들이 될거야
그 때마다
난 니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고
내가 이렇게 웃고 있었으면 좋겠어
사랑해 처음부터 그랬었고
지금도 그래
헤어짐을 준비하며
울지마라 그대여,
네 눈물 몇 방울에도 나는 익사한다.
울지마라, 그대여
겨우 보낼 수 있다 생각한 나였는데
울지마라, 그대여
내 너에게 할 말이 없다.
차마 너를 쳐다볼 수가 없다.
약해지지마
있잖아, 불행하다며
한숨쉬지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있는거야
난 괴로운 일도
많았지만
살아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마
스며드는 것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에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달
너도 보이지
오리나무 잎사귀에 흩어져 앉아
바람에 몸 흔드려 춤추는 달이
너도 들리지
그래도 그래도
너는 모른다
둥그런 저 달을 온통 네 품에
이런 시
내가 그다지 사랑했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평생 못 올 사람인 줄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어여쁜 그대는 내내 어여쁘소서
꿈, 견디기 힘든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꿈,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의 전부,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소화기
딱 한번만 숨쉬고 싶어 세상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는 거야 고요한 평화는 또 다른 죽음이었어 구석진 곳에 차갑게 방치된 채 내가 나를 보지 못한 날들이 뿌옇게 쌓였어 더듬이를 잃은 시간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고 있어 자궁 속인지 무덤 속인지 모를 이 곳에서 나, 붉게 물들인 시간이 녹슬어 바닥까지 번졌어 한때 내 안에도 출렁이는 바다가 있었어 지금 하얀 포말 같은 언어들이 딱딱하게 굳어가 나를 깨우고 싶어 누군가의 손길에 세차게 흔들리고 싶어 나를 잠근 안전핀을 뽑고 내 안을 확인하고 싶어 나만을 태울 수 있는 불길을 만나 한순간의 뜨거움을 향해 확 나를 쏟어리고 싶어 딱 한 번만 숨 쉬고 싶어
소년
희맑은
희맑은 하늘이었다.
(소년은 졸고 있었다.)
열린 책장 위를
구름이 지나고 자꾸 지나가곤 하였다.
바람이 일다 사라지고
다시 일곤 하였다.
희맑은
희맑은 하늘이었다.
소년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꿈
가끔 네 꿈을 꾼다
전에는 꿈이라도 꿈인 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이 별의 일
너와의 이별은 도무지 이 별의 일이 아닌 것 같다.
멸망을 기다리고 있다.
그 다음에 이별하자.
어디쯤 왔는가, 멸망이여.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한가
옅은 하늘빛 옥빛 바다의 몸을 내 눈길이 쓰다듬는데
어떻게 내 몸에서 작은 물결이 더 작은 물결을 깨우는가
어째서 아주 오래 살았는데 자꾸만 유치해지는가
펑퍼짐한 마당바위처럼 꿈쩍 않는 바다를 보며
나는 자꾸 욕하고 싶어진다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해만 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