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당신은 왜 나를 열어두고 혼자 가는가
'(BLAH >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날 수 있어, 룩셈부르크를 찾아가 (0) | 2014.10.16 |
---|---|
지치고 힘들었을 나에게 (0) | 2014.10.11 |
푸른밤 (0) | 2014.10.11 |
간격 (0) | 2014.09.23 |
자살 (0) | 2014.09.20 |
푸른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 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네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간격
붙잡을 수 없는 그 거리는
또 얼마나 아득한 것이랴
바라볼 수는 있지만
가까이 갈 수는 없다
그 간격 속에
빠져 죽고 싶다
자살
눈을 깜박이는 것마저
숨을 쉬는 것마저
힘들 때가 있었다
때로 저무는 시간을 바라보고 앉아
자살을 꿈꾸곤 했다
한때는 내가 나를 버리는 것이
내가 남을 버리는 것 보다
덜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무가 흙 위에 쓰러지듯
그렇게 쓰러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당신 앞에
한 그루 나무처럼 서 있다
사랑의 이율배반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삶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안녕
우린 아마
기억하지 않아도
늘 기억나는 사람들이 될거야
그 때마다
난 니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고
내가 이렇게 웃고 있었으면 좋겠어
사랑해 처음부터 그랬었고
지금도 그래
헤어짐을 준비하며
울지마라 그대여,
네 눈물 몇 방울에도 나는 익사한다.
울지마라, 그대여
겨우 보낼 수 있다 생각한 나였는데
울지마라, 그대여
내 너에게 할 말이 없다.
차마 너를 쳐다볼 수가 없다.
약해지지마
있잖아, 불행하다며
한숨쉬지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있는거야
난 괴로운 일도
많았지만
살아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마
스며드는 것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에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달
너도 보이지
오리나무 잎사귀에 흩어져 앉아
바람에 몸 흔드려 춤추는 달이
너도 들리지
그래도 그래도
너는 모른다
둥그런 저 달을 온통 네 품에
이런 시
내가 그다지 사랑했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평생 못 올 사람인 줄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어여쁜 그대는 내내 어여쁘소서
꿈, 견디기 힘든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꿈,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의 전부,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소화기
딱 한번만 숨쉬고 싶어 세상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는 거야 고요한 평화는 또 다른 죽음이었어 구석진 곳에 차갑게 방치된 채 내가 나를 보지 못한 날들이 뿌옇게 쌓였어 더듬이를 잃은 시간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고 있어 자궁 속인지 무덤 속인지 모를 이 곳에서 나, 붉게 물들인 시간이 녹슬어 바닥까지 번졌어 한때 내 안에도 출렁이는 바다가 있었어 지금 하얀 포말 같은 언어들이 딱딱하게 굳어가 나를 깨우고 싶어 누군가의 손길에 세차게 흔들리고 싶어 나를 잠근 안전핀을 뽑고 내 안을 확인하고 싶어 나만을 태울 수 있는 불길을 만나 한순간의 뜨거움을 향해 확 나를 쏟어리고 싶어 딱 한 번만 숨 쉬고 싶어
소년
희맑은
희맑은 하늘이었다.
(소년은 졸고 있었다.)
열린 책장 위를
구름이 지나고 자꾸 지나가곤 하였다.
바람이 일다 사라지고
다시 일곤 하였다.
희맑은
희맑은 하늘이었다.
소년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